천 개의 파랑, 감정의 경계

누구나 기계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천 개의 파랑>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기계가 감정을 느낀다는 상상은 처음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이야기 속 ‘하늘’을 따라가다 보면 그 감정들이 꼭 남의 일 같지만은 않게 느껴져요.

가끔은 마음이 무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정을 느끼는 게 피곤해서 무시하거나 넘기는 날이 많아졌고,
이젠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감동 받지도 않게 됐다고 느꼈어요.
그런 때에 <천 개의 파랑>을 읽게 됐어요.

이 책은 인공지능 경주마 ‘하늘’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요.
무엇을 느끼는지, 왜 살아가는지, 감정이란 건 
도대체 뭔지 되묻게 만드는 책이었어요.

다들 그렇듯 처음엔 ‘기계가 감정을 느낀다’는 설정은 잘 와 닿지 않았어요.
그런데 읽다 보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도
결국은 경험과 기억이 쌓인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점에서 이 책이 말하는 '감정의 경계'는
꼭 정해진 틀 안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 목차



진짜 이야기의 시작

책은 인공지능 경주마 하늘이 부상으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면서 시작돼요.
‘기계가 고장 난 거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늘은 ‘경주를 그리워하고, 상실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그려져요.
처음엔 그게 좀 낯설었어요.
기계가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었거든요.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 부터 점점 다르게 느껴졌어요.
하늘이 느끼는 감정들이 이상하게도 익숙했고, 오히려 더 명확해 보였어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자각하고, 그 상실을 설명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공감이 생겼거든요.

이제는 더 이상 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하늘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태도를 보여주더라고요.
그 장면들을 통해, ‘무언가를 잃었다는 감각’이 얼마나 큰 감정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하늘이 요양원에 들어가면서 시작되는 새로운 일상도 인상 깊었어요.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들이
하늘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삶’이었고, 그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어요.
읽는 내내, 너무 당연하게 지나쳐버린 나의 일상들도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감정은 기억에서 비롯된다는 말

하늘은 인간처럼 태어난 존재는 아니지만,
기억을 축적하면서 감정을 ‘학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더라고요.
처음엔 기능처럼 보였던 그 감정들이
점점 더 ‘진짜 마음’에 가까워지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책에서 가장 오래 남았던 문장은
“감정은 기억에서 비롯된다”는 말이었어요.
하늘이 그 문장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별말 아닌 것 같은데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책장을 넘기고 나서도 그 말만 계속 떠올랐어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도 대부분 기억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좋았던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는 이유,
어떤 장면을 보며 이유 없이 울컥하는 순간들,
그 모두가 마음 어딘가에 남은 기억에서 시작되잖아요.

하늘이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때
그게 명확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탐색하려는 모습이
너무 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그 모습이 낯설다기보다, 오히려
요즘 내 감정을 설명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나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요.
문득 생각이 난 게 있어요. 기억이 쌓이면서 감정이 생기고,
그 감정이 우리를 사람 답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날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특정 장면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였어요.
말이 많지 않은 이야기인데, 읽고 나서 마음에 여백이 생기는 듯 했어요.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요즘은 감정 표현조차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하라고 하잖아요.
‘이건 왜 슬퍼?’, ‘이건 왜 화나?’ 같은 질문이 따라붙고,
결국 설명이 되지 않으면 그 감정은 틀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이 책은 감정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한다는 걸 잔잔하게 알려주는 이야기였어요.
하늘이 요양원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 속에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이 많아요.

그저 함께 있는 시간, 같이 앉아 있는 공기,
그런 것들이 전하는 감정이 있더라고요.
그런 감정을 요즘은 자주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책이 더 오래 남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 곁에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이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요즘 저도 비슷한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신혼인데도 어쩐지 자주 삐그덕 거리다 보니,
‘이 사람이 정말 내 곁에 평생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거든요.
물론 별일 아닌 걸로도 다시 웃지만,
그 짧은 거리감이 꽤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뭐, 신혼이라 삐그덕 된다고 들 하지만요.

천 개의 파랑, 곁에 있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된 나에게

요즘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 분들,
뭔가 마음이 딱딱하게 굳은 것 같다고 느끼는 분들이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과학이나 인공지능 이야기라기보단
‘감정’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특히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기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감정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바쁘게 살아가느라 마음을 미뤄두고 있던 분들께,
이 책은 감정에 대해 뭔가를 가르치거나 위로하려 하지 않아요.
그냥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읽고 나면 마음 어딘가 천천히 풀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여운을 주는 책 <천 개의 파랑> 이에요.